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.16 군사정변 (문단 편집) === 전후 군부 내 [[인사적체]] === 6·25 발발 당시 95,000명 규모였던 한국군은 6·25를 치르며 휴전 당시에는 49만 2,000명으로 그리고 당시에는 70만으로 급팽창한다. 이 와중에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들로부터 새로운 군사지식과 과학기술을 습득했으며, 고급 지휘관들을 선발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.[* 1953년 기준 [[대한민국]] 전체의 [[미국]] 민간 유학생이 7백명이 좀 못되는데, 미국으로 [[유학]]간 장교들은 1천에 육박한다. ] 이런 식으로 [[미군]]식 선진 행정 시스템을 겪은 그들이 [[일제강점기]] 시절 행정업무 방식을 가진 당대 [[정치인]]이나 공직자들에게 강한 불만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. 당시 [[대한민국 육군|육군]] [[장교]]들의 사정을 보자면, [[6.25 전쟁]] 이후 조직이 비대해지고 그 결과 인사적체가 발생하면서 승진이 막혀버린 '''[[육군사관학교|육사]] 8기생''' 등 중견 [[장교]]들의 불만이 극심했다. 즉, 그 앞 기수들까지는 육군의 비대화 과정에서 대령 이상으로 빠르게 진급했으나, 8기부터 확장에 제동이 걸리며 진급이 적체되어 대령을 못 단 [[대포중|중령]]들이 대량으로 발생했다. 가령, 당시 [[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]]이던 [[장도영]]은 20대에 사단장, 30대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불과 3살 연하의 [[김종필]]은 만년 중령 신세였다. 그런 상황에서 [[미국]]의 원조만을 기다릴 수 없었던 [[장면]] 정부는 [[경제 개발 5개년 계획]]을 추진하면서[*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다시 추진된다.] 재원의 일부를 국군을 감축하여 조달하려 했다. 당연히 장교들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에 더 극심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. 지금처럼 퇴역한 군인에게 직장 자리 봐주거나 우대하던 시절도 아니었으니까. 이 시기의 군인들은 당시 사회상에 비하여 비교적 우수한 시스템에서 커리어를 쌓았지만 대접 자체는 매우 박해서 군인 월급으로는 일가족이 건사하기도 어려웠다. 이 때문에 부정부패, 물자 횡령과 뇌물이 성행했다. 여기에 의외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백선엽-정일권-이형근 군사 파벌의 독식 및 경쟁이라는 막장스러운 상황도 한몫 단단히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